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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는 아무리 옳은 소리라도 일정한 자격을 부여받은 사람만이 그 말을 할 수 있다는 모종의 신화가 있다. 그래서 학벌이 좋지 않은 사람들은 대개 학벌에 대해 말하는 행위 자체를 부끄러워한다. 사회 운동을 하거나 어릴 적부터 공부 외적인 길로 진로를 틀었던 경우가 아닌 이상 거의 그렇다.



H의 예시를 들며 내가 말하고 싶은 바는 두 가지다. 첫째는 학벌 소속감이 구성원들의 의식 체계를 지배한다는 것이다. 누구나 아는 이야기지만, 환기해보자는 의미다. 둘째는 학벌에 관한 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아원에서 자란 소녀 주디와 비슷한 처지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학벌 반경 바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H처럼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상 속의 명문대와 상상 속의 지방대를 마음 속에 품고 살아간다. 이 이미지들의 대부분이 미디어나 어른들 말씀, 학창시절 친구들의 입시 결과를 통해 학습된 것이다. 그저 명문대 다니는 사람들은 공부를 잘했을 것이고, 유명하지 않은 대학을 다니는 사람들은 공부를 못했을 것이라고 유추할 뿐이다.



① 아무리 본인이 통찰력이 좋고 현명해도 이 세상에는 내가 피부로 느낄 수 없는 종류의 박탈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명심했으면 한다. 명문대생이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해도 비명문대생의 심정을 온전히 헤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② 그렇다고 해서 학벌 자체에 대한 죄의식을 가지고 어설프게 도덕적인 글을 쓰려고 하면 곤란하다. 솔직하게 자신의 욕망이 무엇이었는지 인정하고 자신의 위치를 객관적으로 인지하는 편이 훨씬 낫다.

③ 명문대 와봤자 소용없다느니, 이제는 학벌도 의미가 없다느니 하는 소리는 최대한 담아두었으면 좋겠다. 당신이 아무리 취직 안 되는 SKY 학생이라도 그렇게 말하는 걸 조심해야 한다. “SKY 다녀도 취직이 힘든 사회”의 진짜 서브 텍스트는, “SKY 아닌 학생은 더 힘든 사회”라는 것이지 “학벌주의 철폐”가 아니다.

④ 학벌은 아예 숨기거나 확실히 드러내는 편이 좋다. 또한 학벌이 좋지 못한 사람이라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좋은 사람이라면 자기 위치를 확실히 인정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애매하게 숨기고 애매하게 드러내면 불특정 다수에게 배신감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⑤ ‘자존감’같은 단어를 남용하지 말았으면 한다. 여기서 지인 A의 일화를 소개한다. A는 모 명문대 본캠 학생이다. A는 예전에 같은 대학 분교 학생인 B와 연애를 했다. 그가 말해주길, B는 똑똑하고 학점도 높고 진취적인 성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시로 자기방어의 태세를 취했다고 한다. 누가 자길 칭찬하기라도 하면 “아니야, 나는 그래도 ㅇㅇ캠퍼스인걸” 같은 수사를 붙이면서 말이다.



차별의 무서운 점은 차별받는 자로 하여금 저항 자체를 못하도록 막는다는 것이다. 많은 엘리트들은 이 사실을 간과한 채 불특정 다수를 위로한다. 그리고 불특정 다수는 실제로 그들에게 열광한다. 이 패턴이 무서울 정도로 반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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